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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의 역사는 ‘서편제’를 분수령으로 그 이전과 이후로 구분될 수 있다. 60년대 최고 흥행작 ‘미워도 다시 한번’ 30만 이래 고만고만하던 극장 관객 수는 1993년 ‘서편제’ 개봉 때 무려 100만을 넘긴다. 한국 영화 사상 최초의 쾌거였다. 이 동력이 발판 되어 몇 년 후 ‘쉬리’가 단박에 600만 관객을 끌어 모으며 우리 영화 르네상스를 열었고, 2003년 ‘실미도’에 이르러선 급기야 1,000만 관객 시대로 들어선다. 오늘날의 코로나 시대,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과 넷플릭스를 통해 한국 영화의 위상을 세계에 알린 ‘기생충’과 ‘오징어 게임’의 탄생도 실은, 거장 임권택 감독이 30년 전 ‘서편제’를 통해 다져 놓은 토양 덕분일 것이다.
단성사 개봉 당시 김영삼 대통령 내외까지 청와대에서 관람했다며 연일 장안의 화제가 되었음에도 내게는 어쩐지 ‘서편제’가 관심권 밖이었다. 판소리나 우리 전통문화를 철없이 얕잡아 보며 시건방을 떨던 시절이기도 했고, ‘국뽕’ 장단에 난리법석이구나 하는 괜한 의심도 한몫했다. 몇 년 후 비디오를 빌려와 집에서 뒤늦게 보았을 때의 놀람과 감동이 지금도 선명하다. 혈연은 아니지만 운명적으로 가족이 된 세 식구의 슬픈 이야기가 플래시백으로 이어지는 전개로 인해 쓸쓸하고 아련했다.
이전의 한국영화에선 본 적 없었던 독특한 촬영 기법들이 두 시간 내내 몰입도를 높였다. 무엇보다도 영상과 어우러진 음악, 음악과 어우러진 영상이 엔리오 모리코네 음악의 영화 ‘미션’을 다시 보는 듯한 감동을 불러왔다. 엔딩 부분에서 남매가 만나 노래하고 장단 맞추는 ‘심청가’ 대목에선 화면 속 두 사람과 함께 나도 모르게 눈물을 쏟았다. 우리 가락 판소리에서 찐한 감동을 느꼈던 난생처음의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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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편제(1993) / Sopyonje (Seopyeonje)
'감독(Director) : 임권택(Im Kwon-Taek)
출연 :
김명곤(유붕),오정해(송화),김규철(동호),신새길(금산댁),안병경(낙산거사),최동준(송도상),최종원(천가),강선숙(세월네),주상호(약장수),이인옥(도상처),유명순(주모),김경란(계꾼),박예숙(계꾼),정미경(계꾼),조학자(계꾼),이석구(창극단원),유형관(창극단원),김기천(남편약장수),방은미(아내약장수),고동업(한량),박길수(한량),손영호(한량),송영탁(웨이터),권호웅(건재상주인),이은숙(작부),오연실(기생),윤혜영(기생),조영재(고수),김유경(춘향),김송(아역),고승유(아역),김지훈(아역),문혜지(아역),㈜MTM(보조출연)
줄거리 :
1960년대 초, 어느 산골 주막에 30대 남자가 도착한다. 그는 주막 여인의 판소리에 회상에 잠긴다. 어린 시절 동네에 소리꾼인 유봉(김명곤)이 찾아온다. 동네 아낙인 동호(김규철)의 어머니는 유봉과 사랑에 빠져 마을을 떠난다. 유봉의 딸 송화(오정해)와 넷이 살던 중, 동호의 어머니는 아기를 낳다 죽는다. 유봉은 송화에게 소리를 가르치고, 동호에게는 북치는 법을 가르친다. 그러다가 전쟁으로 인해 생활이 어려워지고, 소리를 가르치기 위해 쉴 틈 없이 다그치는 유봉을 이해하지 못하는 동호는 유봉과 싸우고 떠나 버린다.
동호가 떠난 뒤 송화가 식음을 전폐하고 소리도 포기한 채 그를 기다리자, 유봉은 한이 맺혀야 진정한 소리를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송화의 눈을 멀게 만든다. 동호는 낙산거사(안병경)를 만나 송화의 소식을 듣고 수소문 끝에 대폿집에서 송화와 재회한다. 둘은 어떤 말도 하지 않고 한 명은 소리를, 또 한 명은 북을 치면서 밤새 한을 풀어낸다. 아침이 되고 동호와 송화는 말없이 헤어진다. 송화는 한 소녀를 앞세우고 길을 떠난다.
Casts : Oh Jeong-Hae, Kim Myeong-Kon, Kim Kyu-Cheol, Ahn Byeong-Kyeong, Choi Dong-Jun Synopsis : It is early 1960s. A man in his thirties arrives at a small tavern in the mountain village. He is lost in memories at the sound of pansori sung by the tavern owner. In his memory, he is young and Yu-bong (Kim Myung-kon), a pansori singer comes to the village. A village woman, Dong-ho's (Kim Kyu-chul) mom, falls in love with Yu-bong and leaves the village with Dong-ho and Yubong. Dong-ho and his mother, Yu-bong and his daughter Song-hwa (Oh Jeong-hae), form a family. But Dong-ho's mom passes away giving birth to a baby. Yu-bong teaches pansori to Song-hwa and drumming to Dong-ho.
Then the war breaks out and as it becomes more difficult to live, Dong-ho can't stand the way Yu-bong pushes Song-hwa and him to learn pansori. Eventually, Dong-ho gets into a quarrel with Yu-bong and leaves the town. After Dong-ho leaves, Song-hwa refuses food and drink, just waiting for him to return. Seeing this, Yu-bong makes Song-hwa become blind believing that one can truly learn to sing pansori only when the person has great resentment in life. Dong-ho coincidentally comes across Naksangeosa (Ahn Byung-kyung) and hears what happened to Song-hwa. After a long search for her whereabouts, he finally meets Song-hwa at a groggery. Without any word, they do pansori. Song-hwa sings and Dong-ho drums for her, resolving their deepest sorrow. When the morning arrives, Dong-ho and Song-hwa part one another without words. Song-hwa takes off with a girl guiding her w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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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시작은 전라남도 보성 땅, 1970년대 초중반으로 짐작된다. 읍내와는 동떨어진 채 야트막한 산들로 첩첩 둘러싸인 고갯길 외딴집으로 한 중년의 남자가 찾아든다. 표정으로 보아 굴곡진 인생을 살았음직하고, 눈빛에는 뭔가를 혹은 누군가를 찾는 듯 깊은 사연이 엿보인다. 사람들은 이 고갯길을 소릿재라 부르고 이 집은 소릿재 주막으로 불린다. 이곳에 소리꾼 아낙이 산다는 풍문을 듣고 찾아온 터였다. 임권택 감독의 93번째 작품인 ‘서편제’는 5부로 이어지는 이청준의 연작 단편 ‘남도사람’의 1부와 2부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작가가 70년대 후반에 내놓은 1부 ‘서편제’와 2부 ‘소리의 빛’을, 영화 속 남주인공이자 전 문화관광부 장관이기도 했던 김명곤 씨가 각색해 시나리오를 만든 것이다.
유봉(김명곤 분)-송화(오정해 분)-동호(김규철 분), 서로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아버지와 딸과 아들로 살아온 판소리 가족의 삶과 죽음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하룻밤 묵어간다며 소릿재 주막에 들른 남자는 유봉의 의붓아들 동호다. 사춘기 때 집 나가 혼자 살다가 결혼을 하고부터는 옛 가족이 그리워져 뒤늦게 찾아 나선 것이고, 이 주막집에 한때 유봉과 송화 부녀가 살았었다는 풍문을 듣고 찾아온 터였다. 저녁식사 후 소리꾼 아낙과 마주 앉은 동호, 아낙의 구성진 판소리와 함께 어릴 적 기억들이 아련하게 소환되고, 그 옛날 판소리 가족의 고달팠던 삶이 하나둘씩 회상으로 이어진다.
엄마 등에 업힌 어린 동호가 비 오는 날 유봉과 송화의 뒤를 따라 갯벌과 숲길을 지나는 장면부터, 영화 속에는 남루한 가족이 정처 없이 유랑길에 나서는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남도를 떠돌며 이 동네 저 동네 소리 품을 팔아먹고사는 소리꾼 가족의 숙명이다. 영상 속 길 위의 풍광은 전형적인 로드무비에 걸맞게 너무나 아름답지만 인물들의 발걸음은 마냥 쓸쓸하고 처연하다. 예외인 경우가 청산도 황톳길 진도아리랑 대목이다. 시골 밭 사이로 꾸불꾸불 이어지는 돌담길을 걸으며 세 식구는 흥겹게 노래하고 덩실덩실 춤춘다. 한동안 밥벌이를 의존했던 약장수 부부에게서 쫓겨난 직후라 즐거울 기분이 전혀 아닐 상황이었건만, ‘사람이 살면은 몇백 년 사나. 개똥 같은 세상이나마 둥글둥글 사세’로 시작되는 아버지 유봉의 선창에 송화와 동호 모두 저절로 흥이 나 장단 맞추는 것이다. 가족의 즐거운 한때를 보여주는 유일한 장면이다. 멀리서 다가오는 인물들을 향해 카메라를 고정시켜 놓고 5분 넘게 한 번에 찍은 이 롱테이크 장면은 우리 영화사에 최고의 명장면으로 꼽힐 것이다.
그들이 걸어왔던 400m 돌담길은 30년이 지난 지금은 세상 많은 이들이 즐겨 찾는 관광지가 되어 있다. ‘서편제길’이라는 이름도 붙어 있다. 영화에선 농사 끝난 뒤라 온통 흙으로만 뒤덮였던 단색의 밭과 밭 정경이었지만 지금은, 계절에 따라 노란색 유채꽃과 청보리 또는 코스모스가 만발하는 천연색 길로 꾸며진다. 세 식구의 춤사위 발자국에 흙먼지 풀풀 날리던 그 황톳길도 말끔한 포장길로 바뀌어 있다. 아름다운 주변 풍광에 취해 저절로 발걸음이 느려진다고 하여 ‘슬로길’이다. 전남 완도군 청산도를 제주올레처럼 해안 따라 한 바퀴 빙 둘러 잇는 ‘슬로길’은 모두 11개 코스에 17개 길로 구성되어 있다. ‘서편제길’은 1코스를 구성하는 4개 길 중 3번 길이다. 완도항에서 뱃길 따라 50리인 청산도항에 내리면 남쪽으로 1.5km, 걸어서 20분 걸리는 위치다.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역시 남매의 재회 장면이다. “소릴 쫓아 남도 천지 안 돌아본 데가 없는 위인이오.” 장님이 되어 있는 누이 송화를 앞에 두고 동호가 아는 체 없이 노래를 청한다. “들을 만한 데도 없이 천하기만 한 소리요.” 이어지는 심청가 한 대목, 누이의 소리와 남동생의 장단이 어우러지며 서로의 한을 풀어내는 장면이 6분간 이어진다. 그 옛날 부친 유봉이 남매를 가르치며 갈구했던 득음의 경지, 한의 경지에 이른 소리와 장단이다. 노래 중반부터 송화가 흘리는 눈물로 보아, 그녀도 이미 앞에 앉은 이가 그토록 오랜 세월 그리워했던 남동생 동호임을 알아차린 듯하다.
김명곤과 오정해 두 배우와 여러 명창들의 판소리 외에도 가수 김수철이 작곡한 연주 음악 두 곡이 영화의 장면 장면들을 오래 기억에 남게 한다. 심청가 후반부에 ‘아이고 아버지 여태 눈을 못 뜨셨소’ 하는 대목부터 오버랩 되는 ‘천년학’은 이전 여러 장면에서 반복해 흐른 바 있고 영화 ‘서편제’를 대표하는 음악이다. 동호가 유봉을 박차고 떠날 때 흘렀던 아련한 멜로디의 ‘소리길’ 또한 헤어지는 남매의 애틋한 심정을 잘 표현하고 있다.
영화는 장님인 송화가 눈 내리는 날 어린 소녀를 앞세워 어딘가로 떠나는 장면으로 끝난다. 빨간 옷을 입은 이 아이가 혹시 송화의 피붙이인지 궁금해하는 관객들이 많았다. 임권택 감독은 정성일 씨가 출간한 대담집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 2’에서 그 아이가 누구인지 상관없다고 말한다. ‘판소리가 완전히 시들어버린 한겨울 같은 세상을 가고 있지만, 언젠가 저런 어린 생명력처럼 불씨로 남아서 살아낼 것’이라는 기대와 희망을 표현했다는 말이다.
'“갈까부다, 갈까부다, 님을 따라서 갈까부다. 천리라도 따러가고 만리라도 따러 나는 가지. 바람도 수여 넘고 구름도 수여 넘는 수진이 날진이 해동청 보라매 모두 다 수여 넘는 동설령 고개 우리 님이 왔다 허면 나는 발 벗고 아니 쉬여 넘으련만 어이허여 못 가는고. 무정하여 아주 잊고 일장수세가 돈절헌가, 뉘년의 꼬임을 듣고 여엉 이별이 되얐는가? 하날으 직녀성은 은하수가 맥혔어도 일년일도 보건마는 우리 님 계신 곳은 무삼 물이 맥혔기로 이다지도 못 오시나? 이제라도 내가 죽어 삼월동풍 연자되여 임 계신 처마 끝에 집을 짓고 노니다가 밤중만 임을 만나 만단정회를 풀어 볼거나. 아이고 아이고 내 신세야! 내 신세는 어쩔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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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서편제」는 춘향가의 이 대목과 함께 시작하여 심청가의 ‘심봉사 눈뜨는 대목’으로 끝맺는다. 그리움으로 찾아가고, 그리움으로 기다려 온 남매-동호와 송화-가 만나던 날 밤, 그 주막에서는 심청가와 북장단이 밤새도록 이어진다. 그 소리와 장단은 몸을 대지 않고도 능히 서로를 희롱하고 서로를 보듬어 안는 듯하였다. 이튿날 아침, 이들은 서로 말없이 헤어진다. 그리고 송화는 말한다.
“恨을 다치고 싶지 않아서지요.”
“우리는 지난밤 恨을 풀어냈어요.”
송화의 이 대사는 막연하기 그지없다. ‘한을 다치고 싶지 않아서’라는 말이 어떻게 오랫동안 서로를 찾고 기다려온 이들이 모르는 사람인 체 다시 헤어지는 이유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지난밤 한을 풀어냈다는 것은 무슨 뜻이며, 그 풀어냈다는 한은 다치고 싶지 않은 한과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가? 이들은 서로 그리워하게 만든 것은 무엇인가? 도대체 어떤 사연이 이들을 서로 모르는 사람처럼 헤어지도록 하는 것일까?
아버지, 누나, 동생으로 등장하는 유봉, 송화, 동호는 혈연으로 맺어진 관계가 아니다. 송화는 유봉이 소리를 가르치려고 데리고 다니는 고아이고, 동호 역시 유봉이 한때 살을 맞댄 과부 여인의 자식일 뿐, 유봉과는 혈연관계를 맺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떤 관계인가? 핏줄이 아닌 그 어떤 관계가 이들을 붙잡아 매고 있는가?
동호 어머니의 죽음을 보여주는 장면은 유봉이 송화와 동호에게 소리를 가르치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서편제」는 유봉이 송화와 동호에게 판소리를 전수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교육적 상황의 복잡성과 미묘함을 다루고 있다. 유봉과 송화 혹은 유봉과 동호 사이에는 거리가 있고, 이 거리는 판소리를 가르치고 배우는 과정에서 좁혀진다. 다소 유머러스하게 표현되는 영화의 몇 장면은 가르치고 배우는 일의 초기 단계를 잘 보여준다. 배우는 일, 소리의 세계에 입문하는 일은 이렇게 시작된다. 명랑하고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시작부터 좌절과 눈물이 동반된다.
표면상으로 보면 이들 세 사람의 관계를 성립시키는 것은 ‘소리’이다. 그러나 유봉의 말대로 소리가 ‘한’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라면, 이들의 관계는 ‘한’으로 성립된, 다시 말하여 ‘한’을 전수하고 전수받는 과정에서 성립된 것이다. 한은 언제나 고정된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맺히고 풀리는 과정을 되풀이하면서 점점 더 높은 차원으로 승화되어 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한은 언제나 동일한-송화와 동호가 지난밤 풀어낸 한, 송화가 다치고 싶지 않은 한, 풀어낸 순간 다시 껴안고 살아야 할- 한이다. 「서편제」는 결국 ‘소리’를 표면에 내세운 한의 이야기이다.
소리의 세계 앞에 서 있는 입문자라는 점에서 송화와 동호가 서로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이 둘 사이에는 차이가 있으며, 그것은 거리를 좁히는 일을 하는 그들의 태도-소리할 때의 송화와 북장단을 하는 동호의 표정-에서 잘 드러난다. ‘소리를 하면 뭐가 나오는가’라는 동호의 질문과 ‘소리를 하면 모든 것을 잊는다’는 송화의 대답은 그들의 차이를 극명하게 대비시킨다. 비록 술집에서, 약장수를 따라다니면서 소리를 하고 있지만, 송화는 소리를 하는 그 순간만큼은 그 안에서 모든 것을 잊는다. 그러나 동호는 거의 불만으로 일관된 표정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여러 가지 생각으로 괴로워한다. 이러한 동호의 상태는 동호와 소리 사이의 순수한 만남을 허락하지 않고, 급기야 송화의 소리까지 가로막는다. 그의 북장단은 소리가 나아갈 길을 닦아주기는커녕 오히려 그 소리를 방해한다. 그동안 못마땅한 눈으로 지켜보던 유봉은 결국 소리판에서 동호를 내동댕이친다. 그날 저녁, 유봉은 동호에게 호소한다. 북이 무엇인가, 소리와 장단은 어떤 관계인가, 너는 어떤 모습인가……. 동호는 여전히 무감동하다.
동호는 소리의 맛을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일까? ‘정 때문에’ 혹은 ‘누나에 대한 애정 때문에’ 떠나지 못하고 억지로 북을 치고 있었던 것일까? 유봉은 동호가 재능이 없음에도 차마 버릴 수 없어서 동호에게 북을 가르친 것일까? 동호는 정말 재능이 없었던 것일까?
진도 아리랑을 부르며 걸어오는 롱 테이크 씬은, 동호의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소리에서부터 소리에 포섭되어 가는, 그리고 그 소리에 사로잡혀 있는 동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송화와 동호는 차이를 보인다. 아버지의 선창에 이어지는 송화의 응창에도 불구하고 동호의 북은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킨다. 아버지와 송화의 소리가 동호를 끌어들이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마침내 그 소리의 힘이 동호를 흔들게 되고 동호는 서서히 북을 내린다. 그리고 그 소리 속에서 셋은 하나가 된다. 이들의 어우러짐-그 속에서 저절로 흥과 춤이 생긴다. 소리는 흥을 낳고 흥은 손과 발을 춤추게 한다. 이 순간에는 어떤 근심도, 불만도 있을 수 없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흥이다. 흥을 타는, 흥을 태우는 몸뿐이다.
이 한바탕 어우러짐이 끝나면서 카메라는 회오리바람이 스산하게 스쳐 가는 땅을 비춘다. 이 장면은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지던 흥이 일시에 흩어지는 듯한 느낌을 준다. 흥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과연 어디엔가로 갔는가? 갔다면 어디로 갔는가?
이 극적 어우러짐은 약장수 부부에게서 쫓겨난 직후, 그러니까 결코 흥이 생길 것 같지 않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이루어졌다. 여기에서 흥의 발생이 바깥의 상황으로 말미암아 생겨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흥은 어우러짐 속에, 그 어우러짐을 구현하는 사람들-소리하는 사람들- 속에 있다. 흥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언제나 운동하는 것으로서, 순간 속에서만 자신을 드러낸다. 그 순간을 구현하는 것이 바로 사람의 몸이다. 사람의 몸을 빌지 않고서는 자신을 드러낼 수 없기 때문에, 흥은 사람들-소리의 아름다움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 속에서 꿈틀거리면서 때를 기다린다. 그렇기 때문에 흥은 계속 존재하는 것이라고도, 또 사라지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없다.
다음 장면에 등장하는 앵무새와 마약은 흥이 무엇인가를 보다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소리를 도둑질하는 앵무새, 그러나 앵무새가 훔친 소리는 ‘소리’일 수 없다. 똑같이 ‘좋다’‘얼씨구’라는 소리를 낸다고 해도, 그것은 결코 송화의 ‘좋다’‘얼씨구’일 수 없다. 마약은 앵무새의 반대편에서 흥의 의미를 더욱더 한정한다. 이것은 마약과 흥의 미묘한 관계가 흥의 이면을 설명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마약은 황홀감을 가져다 주지만 그것은 소리에서 느끼는 그 황홀감과 결코 동일한 것일 수 없다. 소리의 황홀감은 반드시 ‘마음’이라는 여과 장치를 통해서만 가질 수 있다. 이 여과 장치를 젖혀두고 황홀감 그 자체를 직접 맛보고 싶을 때, 사람들은 마약으로 손을 뻗게 된다. 소리의 아름다움은, 그 아름다움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의 마음속이 아니고서는 살아있을 수 없다.
그 아름다움을 지키는 일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한 번의 ‘순간’으로 그 아름다움이 영원히 보장된다면 절망이나 노력이라는 말은 무의미할 것이다. ‘순간’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한 번 이루어졌다고 해서 계속 유지되는 것도 아니다. 그 순간은 ‘반복’을 기다리며, 반복은 몸을 요구한다. 그 순간을 보장하는 유일한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소리를 배우는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배움이 언제나 흥의 순간으로 점철되어 있는 것 또한 아니다. 흥은 처절한 몸짓과 지루한 기다림을 밟고서 그야말로 은총처럼, 어쩌다 한번 폭발할 뿐이다. 송화에게 가르치기 위해 (마약을 살 돈이 필요한 친구에게 돈을 주고) ‘귀곡성’을 배워오는 아버지와 헛간에서 ‘귀곡성’을 토해내는 송화의 모습은 이 일이 어떤 일인가를 짐작하게 해 준다.
동호는 떠난다. 그는 아직 그의 몸 저 깊은 곳에서 꿈틀거리는 소리의 부름을 들을 수 없었던 것일까, 아니면 듣고도 일부러 외면할 것일까? 아직 동호를 불러 세울 만큼 강하지 못한 그 소리는 동호의 몸에 깊숙이 감추어진 채 그를 따라간다. 동호는 그가 듣지 못한 것, 아니면 그가 외면한 것을 그의 몸속에 함께 데리고 떠난다.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바로 그 소리라는 것을 모르는 채.
동호가 떠나자 송화는 앓아눕는다. 이제 송화는 소리를 하지 않는다. 무슨 이유에서 일까? 무엇이 송화를 앓아눕게 하고, 소리마저 못하게 하는 것일까? 송화와 동호는 어떤 관계였던 것일까? 그들은 서로 사랑했던 것일까? 그래서 송화는 상사병으로 앓아누워 소리까지 못하게 된 것일까? 갈 수만 있다면 아버지를 버리고 동호와 가고 싶었던 것일까? 동호의 가출을 아버지 탓이라 여겨 아버지에 대해 오기를 부리는 것일까? 아니면 동호의 떠남으로 해서 소리에 대한 회의가 생긴 것일까? 소리 밖 세상에 대해 유혹을 느낀 것일까? 이 모든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어쩌면 송화는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동생이 나가게 된 데는 내 탓도 있다, 동생이 어디에서 어떻게 방황하는지도 모르면서 나 혼자 아버지 말씀에 따라 노래하고 있어도 되는 것일까, 동생이 나간 이유의 한 부분에 이미 내가 관여되어 있는데, 그리고 정말 나는 동생과 달리 소리에 대해서 확신을 갖고 있는 것일까, 등등. 어떤 이유에서든 송화의 행위는 동호의 가출로 마음이 동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말은 비록 ‘소리를 하면 모든 것을 잊는다’고 했지만, 소리에만 몰두하지 못하게 하는 그 무엇이 송화에게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한계는 유봉의 눈에만 보일 뿐, 현재의 송화에게는 결코 한계가 아니다. 그것은 최선이다. 이것을 한계로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버지뿐이며, 그는 그가 속해 있는 소리의 세계에 비추어 송화의 상태를 인식한다.
아버지가 내린 처방은 ‘눈을 멀게 하는 것’이었다. 이 극약 처방에 대해서 여러 가지 생각이 있을 수 있다. 다른 방법은 없었는가? 눈을 없앰으로써 듣게 하려는 소리는 정말 눈이 없어져야 들을 수 있는 것인가? 소리를 위해서 한을 그런 식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가? 그것은 아버지의 이기심을 그럴듯하게 포장한 것이 아닌가? 아무리 아버지라 해도, 소리를 위해서라 해도,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그런 행위를 해도 되는가?
가치로운 세계에 누군가를 입문시키고자 할 때 미리 상대방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면, 교육이라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불필요할 것이다. 그 상대방이 미리 허락받지 않았다고 원망한다면 그는 사랑의 상대를 잘못 보았음을, 그를 제대로 입문시키지 못했음을 슬퍼할 수밖에 없다. 한 세계로의 입문은 이런 방식으로서만 가능하다. 다른 방법 운운하면서 이 일에 대해서 문제 삼는 것은 그 세계 바깥에 있는 사람들의 몫이다. 저항은 언제고 있을 수 있으며, 저항이 있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 이 일은 더욱 의미를 지닌다.
송화에게 약을 먹일 때나 송화의 눈이 멀게 되었을 때 동요의 빛을 찾아볼 수 없는 유봉의 표정은, 그의 가슴에 보통 사람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비밀이 담겨 있음을 나타낸다. 딸의 눈을 멀게 하기까지, 그리고 그 순간에 그가 느꼈을 온갖 인간적인 비애가 무표정으로 나오게 하는 무엇, 그 무엇이 있다. 그의 온 존재가 구속당하고 있는 ‘소리’, 그 소리에 대한 열정이 아니고서는 이 일은 불가능하다.
눈이 멀고 나서도 송화는 한동안 헤어 나오지 못한다. 극약 처방은 하나의 조건일 뿐, 그 자체로 소리를 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이 처방으로서 의미를 지니려면 거기에는 반드시 송화의 마음이 개입되어야 한다. 아버지의 그 행위가 송화에게 이해되고 해석되어야 한다. 눈이 멀고 나서 다시 소리를 하겠다고 하기까지 송화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마도 유봉이 눈을 멀게 했음을 확신하는 순간이 바로 소리를 다시 시작하겠다고 결심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유봉의 마음이 송화의 마음을 비추어 내기 때문이다. 유봉의 마음을 상상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송화는 자신의 마음을 대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보다 심각한 고뇌를 짊어지고 있는 유봉의 존재로 인하여 송화는 위로받을 수 있었다.
소리재.
“소리 공부하기는 더없이 좋은 곳이다.”
“산 입에 거미줄 치랴.”
유봉의 이 대사는 소리재에서 그들이 할 일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훔쳐온 닭 때문에 몰매 맞고 난 다음 ‘거 목청 한번 좋다’고 말하는 유봉의 모습에서 이 삶을 살아가는 구체적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소리재에서, 아버지와 살면서 송화의 한은 새로운 차원으로 발돋움한다. 소리재에서의 삶은 송화로 하여금 피를 토해 내게 하고 몸부림치게 한다. 이제 송화의 소리는 그저 예쁘기만 한 아이의 소리가 아니다. 소리를 내기 위해 산을 향해 피를 토하는 송화와 그 몸부림을 지켜보는 아버지를 둘러싸고 한이 첩첩 쌓인다. 그러고 나서 유봉은 송화의 가슴에 마지막 한을 심는다. ‘한에 묻힌 소리가 아니라 한을 넘어선 소리를 하라’는 말과 함께 유봉은 이 세상을 떠난다. 이제 한은 송화 혼자의 몫으로 남겨진다. 아버지를 대행할 사람이 없다는 것, 그 소리를 들어줄 사람이 없다는 것, 송화의 소리를 한의 소리에서 득음의 소리로 넘겨줄 북장단이 없다는 것, 그것이 이제 송화의 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말씀하고 가셨다.
“한을 넘어서면 동편, 서편이 없다. 득음의 경지만 있을 뿐이다.”
아버지 삼년상을 치른 후 송화는 떠돌아다닌다. 떠돌아다니면서 동호를 기다린다. 이때의 기다림은 그 옛날 동호가 떠났을 당시 나무 아래서 기다리던 그 기다림이 아니다. 이제야 송화는 동호를 기다릴 때가 되었다. 기다릴 수 있게 되었다. 송화는 동호가 돌아올 것을 미리 알고 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그들의 한이 소리에 있음을 송화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못 돌아오고, 못 넘어가는 동호와 송화의 한은 한순간에 동시에 해소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동호는 올 수밖에 없다.
두 사람이 만나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득음의 경지가 어떤 상태인가를 잘 보여준다. 눈물의 의미, 그리고 눈물이 멎는 순간, 이 장면에서 ‘심봉사가 눈뜨는 대목’을 부르는 것은 결코 우연일 수 없다. 아버지- 아버지- 심청이만의 흐느낌이 아니다. 눈물이 멎는 순간, 그 순간은 지금까지 귀로 듣던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는, 귀가 아닌 눈으로 소리를 보게 되는, 모든 것이 정지된 고요한 시간이다. 영화의 장면은 그런 순간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그 순간은 바로 영원 그 자체라는 것을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우리로서는 송화가 눈 뜬 세계가 어떤 세계인지 확실히 알 수는 없다. 우리는 그저 그 경지를 일컫는 ‘득음’이라는 단어를 알 뿐이다. 송화는 ‘우리는 한을 풀어냈어요’라는 말 이상을 들려주지 않는다.
‘누가 장님을 데리고 살려고 하겠는가’
이 말에 응답이라도 하듯, 송화는 곱게 빗어 올린 머리에 두루마기를 입고 아이를 앞세우고 떠난다. 천년을 살기 위해, 나비와도 같이.
“제 팔자를 생각해 보면 당치도 않게 편한 세월이 너무 길었었나 봐요. 이젠 그만 어디론가 몸을 좀 옮겨야 할 때가 되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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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 동편제와 서편제 구분
판소리는 우리민족의 정서와 멋과 풍류가 어우러진 종합예술로서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줄거리를 지닌 이야기를 음악적으로 표현하는 예술형태이다.
주로 호남지방을 중심으로 전승되어 왔으며 지금도 전주대사습대회와 전주세계소리축제의 근간이 되고 있고, 우리 지역을 '소리의 고장'이라고 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
판소리 공연 형태는 한 명의 소리꾼이 고수(북치는 사람)의 장단에 맞추어 창(소리), 말(아니리), 몸짓(너름새)을 섞어가며 긴 이야기를 엮어간다.
『조선창극사』에 따르면 판소리는 동편제, 서편제, 중고제 등 세 유파로 구분하는데
섬진강을 중심으로 동편인 운봉·순창·구례 소리를 동편제,
섬진강 서편인 광주·보성·나주·함평 등지의 판소리를 서편제로 구분한다.
동편제의 특징은 지리산을 닮은 탓에 시작이 진중하고
구절의 끝마침을 되게 하여 마치 쇠망치로 내려치는 듯이 시원함이 느껴진다.
그래서 동편제 명창들은 영웅호걸들의 파란만장을 담은 ‘적벽가’에 능하다.
동편제의 창시자는 조선 후기의 송흥록인데 남원 운봉 비전마을에서 태어났다.
여류명창 박초월이 한때 이곳에 머물며 판소리를 배워서 비전마을은 현재 ‘국악의 성지’로 여겨지고 있다.
동편제 창시자 송홍록은 귀신의 울음소리인 귀곡성의 대가였다고 전한다. 근대 명창으로는 권삼득, 송홍록, 박기홍, 김세종, 송만갑 등을 꼽고 있다.
서편제는 애절하고도 섬세하며 구슬픈 계면조,
즉 듣는 자가 눈물을 흘려 그 눈물이 얼굴에 금을 긋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의 소리를 가지고 있다.
끝마침이 꼬리가 달린 듯 자르르르 붙어다니는 여성적인 소리이어서 서편제 명창들은 슬픈 소리가 많은 심청가에 능하다.
서편제는 박유전이 비조로 일컬어지고 있으며, 보성 율포면 강산마을이 시원으로 알려지고 있다.
정재근, 정응민, 조상현 등 명창이 계보를 이어 왔다고 한다.
요즘 K-팝 인기의 기저에는 멋과 풍류를 표현하기 위해 힘든 득음의 경지를 추구했던 소리꾼들의 정진의 전통이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참고로 1993년에 개봉된 영화 『서편제』는
판소리 서편제에 담긴 한의 정서와 득음을 향한 편집증적 집착을 깔끔하게 담아낸 수작으로 수많은 영화제에 초청되었고, 임권택 감독과 배우 오정해는 크게 유명해졌으며, 한국의 멋과 미를 탁월하게 살렸다는 극찬을 받았던 작품이다.
극장 단성사에서 196일 상영되는 기록을 세웠으며, 우리나라 최초로 1백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로 기록되었다.
[출처] 판소리, 동편제와 서편제|작성자 전주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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