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제아제 바라아제(1989) / Aje Aje Bara Aje (Aje Aje Bara Aje)
'
'
'
감독(Director) : 임권택(Im Kwon-Taek)
출연 :
강수연(순녀),진영미(진성스님),유인촌(현종),한지일(박현우),전무송(스님),윤인자(은선스님),윤양하,김세준(대학생),안병경(송기사),최종원(비구),신충식,김애경(순녀모),김복희,이정애,정미경,조학자,권일정,송희연,홍원선,이석구,조주미,오영화,박예숙,임예심,홍성연,이숙희,백순정,강지영,김해주,김성순,김지현,이은경,이명숙,김유경,장광남
줄거리 :
고등학생 순녀는 손길이 닿지 않는 부성의 아픔만 남기고 떠난 아버지 윤봉스님, 고리대금업을 하는 어머니 제주댁을 뒤로하고 덕암에 찾아와 은선스님을 모시고 비구니가 된다. 순녀는 박현우라는 사람을 구출한 일로 파계아닌 파계를 하여 끝없는 시련을 맞는다. 남해안에서 구도의 길을 찾아 만행중인 진성을 만나 비금도 병원생활을 시작하나 다른 인간의 아픔을 체득하는 기간이었다. 송기사를 건지려던 그녀는 송기사의 죽음으로 덕암사를 다시 찾아 진리,자유,구원 그 어떠한 지순지고의 가치도 사람이 아플때 뿌리내리지 않고는 의미가 없다는 가르침을 스승인 은선으로부터 배운다.
'
'Casts : Kang Su-Yeon, Jin Young-Mi, Yoo In-Chon, Han Ji-Il
SYNOPSIS : A high school girl student Sun-nyeo's father, Buddhist monk Yun Bong, dies. The paternal pain is the only legacy her father left her. Soon-nyeo leaves behind her money-lending mother for Deokam Temple, where she serves Buddhist monk Eun-seon as a Buddhist nun. Sun-nyeo saves a man named Pak Hyun-wu and so starts her 'violation of commandments' and she deals with endless conflict. Sun-nyeo meets Monk Jin-sung who is searching for 'the way' of spiritual morality as he travels along the southern coast. They begin to work at a hospital on Bi-geum Island where Sun-nyeo experiences the pain of humans. Sun-nyeo tries to save Song Ki-sa but is unable to. After Song Ki-sa's death, Sun-nyeo returns to Deokam Temple where she learns about the infinite value of truth, freedom, and salvation from Buddhist monk Eun-seon.
'
'
예전에 90 ~ 2000년대 임권택 감독의 작품을 보며 느꼈던 것은 노장 감독이자 거장의 진면목을 제대로 보여준다는 것이었다. 물론 80년대의 그도 나이를 먹을만큼 먹었지만 말이다. 그런데 근래 들어선 이런 생각을 하게 됐다. 그는 이미 80년대의 작품들만으로 '거장으로서의 진면목'을 모두 보여주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 말이다. 정말 그렇다. 오히려 90년대 들어서면서 임권택은 더욱 실험적이고, 점점 젊어져가고 있다. (각 단어를 따로 이해해주길 바란다. '실험적이라서 젊다' 라는 얘기는 아니니까.) 의도야 어찌됐건 <아제아제 바라아제> 다음 작품이 <장군의 아들>, 자신이 그렇게 외면해왔던 액션 장르로 한 방에 한국영화 역대 흥행순위를 갈아치우더니 몇 년 뒤엔 <서편제>로 자신의 흥행기록을 또한번 갈아치우며 역대흥행순위 1위에 올랐다. ...제임스 카메론을 보는 것 같달까.
영화로 남기보다는 감독으로 남고 싶어 <만다라> 이후에 아무렇지 않게 <아벤고 공수군단>을 만들 수 있었다지만 <장군의 아들>을 만든 이유는 조금 달랐다. 이태원 사장의 권유를 임권택 감독이 받아들였고, 주로 60년대에 그런 장르를 만들었던 본인이 90년대에도 그렇게 정체되어 있을지 점검해 보자고 결심했기 때문이다. 그 전에 <아제아제 바라아제>가 있었다. 두 작품의 느낌은 판이하게 다르며 80년대의 마지막 해를, 종교영화로 마무리 지은 것도 의미심장하다. 당시의 임권택은 나름의 한국적 개성을 갖춘 작품들을 만들어 영화제에 보내고 싶은 욕구가 왕성했다고 하니 그래서 그런 것 아니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 작품의 의미심장함이 그것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어서다.
<아제아제 바라아제>의 시작과 끝은 모두 대립이다.
천불전을 보여주는 타이틀 시퀀스 (<씨받이>, <태백산맥>과 더불어 임권택 감독 작품 중 가장 인상적인 타이틀 시퀀스가 아닐까.) 가 지나면 주인공인 순녀가 비구니가 되고자 절에 도착하고, 작품의 또다른 주인공인 진성 스님을 만난다. 하지만 스님이 그녀를 만나자마자 다짜고짜 하는 말은 환영의 인사가 아닌 "집에서 꾸중 들으셨어요?" 이며 다른 행자들은 그녀를 걱정하는 듯 "고생길 하는 이 곳에 왜 왔냐?" 라고 첫 말을 건넨다. 그리고 해우소를 청소하던 도중 밑에 널려있는 것들을 보며 역겨움에 침을 뱉은 것이 노스님에게 들켜 사실상 순녀는 절에서 그닥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이다. 그럼 그녀는 절이라는 장소와 전혀 무관한 그런 여인인가? 작품의 초반부에 나오는 회상 장면들은 왜 그녀가 고된 행자생활을 견뎌내며 그 곳에 있으려고 하는지, 그리고 왜 그녀가 대립의 한 축이자 중심이 되어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에서 효과를 발휘한다.
그녀가 학생이었을 때 만난 자신의 아버지는 베트남전에서 돌아온 후 머리를 깎고 먹물옷을 입었다. 전무송이 연기해서 그런지 마치 <만다라>의 지산 스님이 그대로 넘어온 듯한 <아제아제 바라아제>의 그는 순녀의 아버지이지만 자신의 딸이 바로 앞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비라는 말을 한 번도 해 주지 않는다. 순녀 역시 어렴풋이 아버지가 앞에 있다는 것을 알지만 아버지에 대해 들은 얘기만 언급만 할 뿐, 알고 있으면서 끝내 스님을 아버지라 부르지 않는다. 그렇게 얘기하지 않은 채 두 사람은 여행을 하며 서로가 가진 고통을 알아가다가 결국 헤어지고 끝내 다신 만나지 못한다.
임권택 감독은 찍었으면 자연스러웠을 법한 장면들을 찍지 않는 경우가 많다. 가령 두 인물이 각자 다른 길로 가야하기에 이별을 한다고 칠 때, 이별을 한 다음 잘 가는지 한 번 쯤은 뒤돌아보는 장면을 넣으면 감정적으로 꽤나 애틋하게 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에선 그런 장면들이 잘 보여지지 않는다. 이별을 한 다음엔 갑자기 다른 장면으로 넘어가는 식이다. 인물들의 감정이나 대사엔 언제나 임권택 감독 특유의 건너뜀의 기점이 들어있고 인물들의 이어지던 감정 또한 그 건너뜀의 기점을 넘어가면 달라져 있다. 그 기점에서 작품의 인물들은 이야기는 진행되지만 설명은 없기에 거기서 본인들의 자율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인데, 그래서 그의 작품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한국영화 사상 가장 자율적인 의지로 움직이는 캐릭터 형태다. 안그래도 냉정한 편이었던 그의 80년대의 작품들 속에서 (아마 전체적으로 봤을 때는 7~80년대의 작품들이 대부분 그러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 단절은 그것을 배가시키는 형태로 받아들이도록 하는데, <아제아제 바라아제>는 마치 그것을 정리하려는 듯한 (80년대 초중반에 비하면) 감정적인 뜨거움으로 단절을 진행시킨다.
작품에서 순녀의 아버지는 그 장소에 올 것이라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바로 등장하고 두 사람은 서로를 단 한 번도 가족적인 호칭으로 부르지 않는다. 하지만 기차역에서 헤어짐의 시간이 왔을 때, 차에 탄 순녀는 참았던 눈물을 터뜨리며 멀어져 가는 아버지의 모습을 바라보는데, 여기서 이 단절은 끄트머리에서 더욱 애틋한 감정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작품 속에선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지만, 그 보여주지 않은 사이에서 인물들은 너무나도 많은 고뇌를 했을 것이다. 머리를 깎았음에도 불구하고 가족을 찾아왔다는 것은 속세를 잊지 못했다는 실패한 중으로서의 증거나 다름없을 것이다. 그 모습을 자신의 딸에게 보여줄 수 있을까? <길소뜸>의 화영이 동진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눈물을 보였지만 끝내 자기 자식을 부정한 채 동진과의 만남마저도 끊어버리고 차를 몰고 가는 결말, <씨받이>의 옥녀가 자신의 자식을 만나고 싶다고 울부짖으며 끌려가지만 그 다음 장면에선 바로 나무에 목을 매단 장면을 보여주는, 격정적으로 물에 처넣다가 마지막에 어느 순간 없어진 그녀의 존재를 알아채고는 조용히, 그리고 멍하게 바라보는 남자의 시선으로 끝을 맺는 <아다다>...
임권택의 80년대가 달려가다 도착한 곳은 끝없이 차가웠던 얼음이었다. 하지만 <아제아제 바라아제>에서 보여진 회상 장면의 끝은 임권택 감독이 앞으로 나아갈 방향, 그리고 순녀라는 인물이 바뀌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제작 당시 강수연의 삭발 장면이 화제가 되었다지만 <아제아제 바라아제>의 상영시간인 2시간 중에서 그녀가 머리 깎은 모습이 등장하는 분량은 30분 정도이다. 아마 그 이유에는 또다른 주인공인 진성 스님이 머리를 깎았으니 그 한 명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싶고, 또 하나의 이유로는 두 사람이 지향하는 불교관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만다라>로 소승 불교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을 다 했다고 느낀 임권택 감독은 이 작품으로 대승 불교에 관하여 이야기한다. 처음 순녀는 자신이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 불교의 나아갈 길을 언론 기자에게 거리낌없이 말하다 은선 큰스님에게 꾸중을 듣는다.
큰스님이 그녀에게 말하는 뉘앙스는 이것이다. 네가 말하는 거 보면 벌써 부처가 된 것 같으니 이 절에 있을 필요가 없겠네. 순녀는 한동안 머리를 깎지 못하는데 부처의 얼굴로 진성과 의견대립을 이룬 이후, 갑자기 큰스님은 그녀의 머리를 깎는 것을 허락한다. 아마 관심을 두고 있었을 것이리라. 순녀의 불교관은 대승 불교 지향적이며 진성은 소승 불교 지향적이다. 순녀가 머리를 깎고 청하라는 이름을 얻었을 때 즈음, 작품은 <만다라>의 '병을 깨지 않고 병 속의 새를 꺼내는 법' 처럼 진성에게 한 가지 화두를 던진다. '달마 스님의 얼굴에는 왜 수염이 없는가?', 그리고 순녀가 본의 아니게 절을 떠나게 됐을 때 작품은 큰스님을 통해 그녀에게도 나름 화두라고 할 수 있는 것을 던진다. '네 정신은 이 곳에 남고 네 육신은 세속으로 나간다. 정신과 육신, 그 둘 중 진짜는 어느 것인가?' <만다라>에 이은 두 번째 화두들, 병 속의 새를 꺼내기 위해 만행을 떠난 두 비구처럼 두 비구니는 그렇게 화두를 풀기 위해 각자 만행길에 오른다.
<아제아제 바라아제>에서 마침내 임권택은 더이상 시대의 어둠을 작품 속으로 끌고 들어오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특히나 작품을 보면서 놀라게 되는 건 순녀로 하여금 세상을 향해 나서게 만드는 원인이 된 현우라는 인물의 등장이다. 그는 빨치산의 자식이고 전쟁 후 연좌제에 묶여 살아가는데 필요한 아무런 일도 할 수 없게 되자 어둠의 세계에 몸을 담았고, 그 때문에 자신을 구해준 순녀를 '빛'이라고 생각한다. <짝코>에서 처음 조심스럽게 이념의 화해를 얘기하던 임권택 감독은 이 작품으로 자신의 과거를 투영시킨다. 그리고 그 이전엔 순녀의 첫사랑이자 고교 담임인 종현이 등장하여 자신의 아내가 80년에 광주에서 죽었다고 이야기하는 장면이 존재한다. 우리는 여기서 그 죽음의 원인이 5.18 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곧이어 그는 순녀와 함께 유적지를 돌면서 백제의 멸망 때 낙화암에서 떨어진 삼천명이 모두 궁녀였다는 이야기에 반론을 제기하며 동학 농민운동의 실패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만약'을 거론한다. '만약...그러하지 않았다면...' 베트남전에 참전한 순녀의 아버지까지, 작품은 순녀가 만나는 여러명의 남자들을 통해서 한국현대사의 아픔을 이야기하며 동시에 그 아픔을 감내하며 살아간다는 건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이야기한다. 본의아니게 역사에 휘말려 들어간 이 남자들을 보라. 역사엔 '만약'이라는 것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만약'을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만약 내가 빨치산의 자식이 아니었다면, 내가 이렇게 되었을까. 만약 내가 베트남전에 참전하게 되지 않았더라면, 머릴 깎을 일이 있었을까. 만약 5.18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내 아내는 살아 있었을까. 그들의 기묘한 삶의 궤적은 삶의 목적 이전에 그 아픔을 잊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어쩌면 아버지와의 만남 이후부터 순녀는 곧바로 대승적 불교관을 가졌을런지도 모르겠다.
"부처님의 얼굴이 왜 이리도 못 생겼을까?"
"못 생겼다고 바라보는 마음이 못생겼을수도 있죠."
"마음을 운운하는 것이 또 하나의 아집일 수 있어요.
"가난하고 불쌍한 농부나 무지렁이 서민들의 얼굴에서 부처님을 발견한 사람이, 주어진 끌을 잡고서 느끼는 대로 새겨진 결과로 나타났다면..."
"성스러운 신앙의 대상을 그렇게 비하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은 아무데서도 구원을 얻지 못해요."
대승 불교가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주는 방식은 먼저 세상 밖으로 나서서 이끌어보는 것이다. 그 점에서 소승 불교는 반론을 제기한다. 자기 자신이 완전하게 깨닫지 못했는데 그 상태에서 구원을 위해 이끌어 간다면, 덜 깨달은 자기 자신의 판단 착오로 구원의 대상을 오히려 구원하지 못하게 될 위험성이 있다는 것이다. 소승 불교는 일단 자기 자신이 수행을 통해 먼저 깨닫고 난 뒤에 가르침을 전파해야 한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여기엔 또다른 단점이 있다. 네가 깨닫는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려서 너무 늦어버렸다면? 네 혼자만의 깨달음이 곧 진리라고 생각한다면? 작품은 대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화두를 풀기 위해 다른 스님과 함께 이곳저곳을 떠돌며 마지막엔 3년동안 토굴 안에서 수행을 거듭하는 진성의 모습을 보여준다. 수행의 방법이 다른 두 사람은 어느 순간 다시 만나게 되고, 진성은 자신이 살아온 삶이 어떻게 보면 수행인 것 같다고 이야기하는 순녀에게 그것은 깨달음의 방법이 아니라고 쏘아붙인다. 진성의 입장에선 수행을 사칭하여 세속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것으로만 보였기 때문이었을테니까. 그런데 임권택 감독은 여기서 두 인물은 절대 좁혀질 수 없다는 것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대승 불교에 대한, 그리고 그것을 대표하는 순녀라는 인물에게 어떤 지지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 편파적이지 않냐고? 아니. 적어도 임권택 감독에겐 정당하다. 그는 이미 <만다라>를 만들지 않았던가.
예를 들면 이런 장면이 있다. 진성은 다른 비구니와 함께 만행 중인데, 도중에 그 비구니가 자긴 도저히 걸을 수 없다고 얘기하며 주저 앉아 버린다. 한숨을 쉬던 진성은 곧 뭔가가 떠올랐다는 듯 갑자기 주위에 돌아다니고 있는 닭 한 마리를 잡아 도망간다. 곧 주인이 닭도둑이라며 쫓아오는데 이 순간, 지쳐 있던 비구니가 빛의 속도로 진성을 앞질러 먼저 도망간다. 결론적으로 진성은 닭을 훔치지 않았고 도망가던 다른 비구니는 어쩌자고 그런 짓을 했냐고 묻는데, 진성이 대답한다. '일체유심조'라는 선사의 깨달음을 지금의 상황으로 끌고 들어온 것이라고. 대승은 세상 속으로 들어와 그 곳에서 깨달음을 찾으려 노력하고 소승은 선대의 깨달음을 현실로 빌려와 그것을 통해 자신이 깨닫게 되는 길을 찾으려 한다. 그것은 두 수행이 가진 방법이기 때문에 어느 것이 하자가 있다고 할 수 없으며 진성의 행동은 소승 수행자로서 할 수 있는 바람직한 행동이었다.
그리고 영화적으로 봤을 때는 유머러스한 면으로서의 역할도 했고. 하지만 작품은 진성이라는 인물에 대해 경계심을 늦추지 않은 채 우리에게 이런 식으로도 질문을 던진다. 진성이 적용한 일체유심조, 즉 마음먹기나 다름없는 원효대사의 말을 깨달음을 향한 가르침으로 활용한 것이 아니라 단지 그 상황을 넘기기 위한 방편으로서만 활용했다면? 그 자신에게도 나름의 절박함이 있겠지만 급한 불부터 끄고 보는 식으로만 이용해놓고 천연덕스럽게 가르침을 논한다고 생각한다면 분명 진성이란 인물이 곧 부처가 될 가능성은 그만큼 적어지는 것과 같다.
그 즈음, 순녀는 현우라는 남자를 구하기 위해 그와 같이 살고 있다. 그가 섹스를 시도할 때는 어떤 갈등도 있었지만, 결국 그녀는 그의 아이를 임신하고 그가 새 인생을 살 수 있도록 돕는다. 현우가 탄광 일을 하다 죽고 유산까지 한 순녀는 곧 두 다리가 없는 남자와 살게 되고 역시 그에게 최선을 다 한다. 하지만 결국 그 남자도 죽고 만다. 하지만 순녀는 좌절하지 않고 곧 조그만 섬에 간호원으로 자진하여 들어간다. 행하는 방식은 반대지만 순녀는 진성과 같은 만행길을 가고 있으며, 속명을 쓰고 머리는 길어졌지만 자기 자신은 여전히 수행자라고 여긴다. 그리고 여기서 작품은 제작 초기부터 개봉 후까지 어떤 논쟁에 휘말리게 된다. 처음 시작은 <비구니>에 이어 이 작품의 촬영까지 반대하면서, 절대 절에서 촬영할 수 없도록 방해한 조계종에서였다. (그 때문에 <아제아제 바라아제>는 <만다라>를 찍었던 절에서 촬영해야 했는데, 한 번 촬영한 곳을 좀 달라 보이게 담아내기 위해서 제작진들이 큰 고생을 했다고 한다.) 그들은 <비구니> 촬영 당시, 임권택 감독을 '비구니 옷 벗겨서 돈이나 벌려고 하는 감독' 정도로 여기고 있었고 이 작품에 와서도 그 인식을 쉽사리 바꾸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국사회는 <아제아제 바라아제>보다 <만다라>에서 더욱 깨우침에 대한 절실함이 보인다는 식으로 거론했다. 그들에게 순녀는 그저 음란한 여자라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도 순녀의 행동에 대해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장면들이 몇몇 있었다. 대표적으로 순녀가 섬으로 들어간 이후의 장면인데 관객에겐 첫 만남인 것처럼 보이는 홀아비인 송 기사가 고생하며 아들을 키우는 것을 본 다음 장면에서 그녀는 갑자기 송 기사의 방으로 덜컥 들어가 그의 곁에서 잠을 청한다. 이것을 과연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임권택 감독은 그것을 '자비심'이라고 말한다. 고통받는 중생들을 자신의 몸으로 기꺼이 품어내는 자비심, 그리고 홀아비인 그를 기쁘게 해 주려는 노력, 모두가 하고 있을 정도로 세상 속의 큰 요소이지만 동시에 한국인들은 천박한 것이라면서 거미줄 치고 사는 듯이 규정해버린 섹스라는 요소, 우리는 그렇게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는 행위를 하지 않는다고 거짓말하지만 사실은 아니다. 우리는 세상이 너무나 일상적인 곳이라고 생각하기에 자기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며 그것으로부터 깨달음을 얻으려고 하는 것을 더 높게 치려는 경향이 있으며, 결국 그것을 통해 뭔가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가 사회를 형성하면서 인간이라면 일상적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면서도 하지 않는다고 거짓말을 하는데, 도대체 그런 내면에서 무엇을 얻어낼 수 있단 말인가? 그렇게 말하면 자신의 내면을 통해 알아가려는 수행에도 거의 고문에 가까운 영상들이 포함되어 있다. 토굴 속에서 수행하던 진성을 조롱하던 한 비구승은 그녀에게 음심을 가라앉히려 성기를 잘라버렸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경악스러운 장면은 깨달음 때문에 묵언수행을 하면서 촛불에 손가락을 지지는 수도승을 고통스럽게 바라보는 법운의 장면이 있는 <만다라>와 자연스레 겹쳐진다. 만약 <아제아제 바라아제>에서 보여진 일련의 장면들이 그들에게 있어 말이 되지 않고 품격을 떨어뜨리는 것이라면 <만다라>의 그런 장면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아제아제 바라아제>에 대한 논쟁은 이것과 무관하지 않고, 사실 무의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만다라>보다도 더 직접적으로 이 현실을 다루고 있는 작품인데 말이다. 순녀의 이런 행동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작품의 앞에서 나온 80년 5월, 한국전쟁, 베트남전, 그리고 공부를 위해 대학으로 간 진성이 보게 되는 연세대의 시위장면들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난 그 사회에 의해서 그 익숙한 것, 있었던 역사를 익숙치 않은 것, 없었던 역사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임권택 감독 역시 본의 아니게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자신의 과거를 뒤돌아보지 않았다. (아마 송 기사의 죽음을 복상사로 처리한 것도 임권택 감독의 기준으로 봤을 때 가장 자연스러운 방식의 죽음이라서 그랬을 것이다. 사실 개인적으론 교통사고사가 더 자연스럽지 않은가 하고 잠시 생각했었는데 말이다. 드라마나 영화나 뮤비나 워낙에 난데없이 교통사고로 가는 사람들이 많다보니.. 복상사 했다는 건 뉴스에도 나오지 않잖아.)
위에서 썼지만 이 작품은 완벽한 해답보다는 좀 더 적절한 방법으로 대승적 수행이 낫지 않겠는가라고 이야기한다. 깨달음으로 가는 길은, 그리고 인생의 해답을 찾는 것은 그만큼 쉽지 않으니까. 진성과 순녀, 둘 중 깨달음의 경지에 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진성은 결국 옛날 선사들의 흉내나 내고 돌아온 것 밖에 되지 않고 순녀는 사람들을 진창 속에서 구해내려 하지만 본의 아니게 그들이 죽고 만다. 순녀는 그들이 죽었다는 것에 좌절한다. 달마 대사의 얼굴엔 왜 수염이 없으며 절에 있는 정신과 세상에 나가있는 육신 중 진짜는 결국 어느 것이었던가? 네 정신이 아직까지 깨어있지 못한데 무턱대고 네 육신을 먼저 보내면 그게 결국 어떤 결과를 불러 일으킬 것인가? 두 사람은 결국 다시 절로 돌아오고 화두를 낸 은선 큰스님은 성불한다. 과연 큰스님은 답을 알고 있었을까? 그것의 여부는 모르지만 결국 그 두 사람은 더 이상의 힌트나 해답을 듣지 못하게 된 셈이다. 그걸 알면 부처가 됐을텐데.
- 원효, <금강삼매경론> 중에서
P.S.1 - 아래 연세대 시위 장면은 실제 상황을 찍은 것이라고 합니다. 20년이 지난 지금 봐도 아주 생생하네요.
P.S.2 - 화두를 풀어 부처의 길을 갈 수 있다면, 수도자로서 그보다 더한 성취와 영광이 어딨을까요? 하지만 한 없이 복잡한 것이 바로 화두였습니다. EBS를 통해 방영되었던 <만다라>를 처음 보고, 나중에 필름으로 처음 봤을 때 스님들의 입에서 여러번 거론되는 '병 속의 새'에 대한 해결책을 끊임없이 고민하다 내린 결론은 이것이었습니다. '병을 깨지 않고 꺼내야 한다면 도구를 병 속에 넣어 죽지 않을만큼 새의 뼈를 부러뜨리면 되지 않나? 뼈를 부러뜨리면 흐물흐물해지던데. <네고시에이터> 보니까 범인이 그렇게 수갑 풀더만..' ...굉장히 잔인한 것이 아닐 수 없지요. 물론 이 방법은 실패확률이 높은 굉장히 위험한 방법이었지만 제 생각은 결국 거기까지였습니다. <아제아제 바라아제>에서 달마 스님의 수염에 관해서 끊임없이 고민하다 내린 결론은 이것이었습니다. '본인이 깎았겠지.' ...저는 스님이 아니니까 그냥 속 편하게 생각하기로...
아. 김기영 감독님은 화끈하시더군요. 감독님의 74년작인 <파계>에서 <만다라>와 비슷한 류의 화두가 나왔었는데 거긴 아마 그릇과 관련된 것이었을 겁니다. 근데 <파계>에서의 스님은 "그릇을 깨버리겠다!" 라고 하더군요. 깨면 해결되는 걸 갖다가... '병을 깨지 않고'라는 전제가 들어가긴 했지만 만약 깬다면 그게 화두가 화두가 아니게 되는걸까 하는 고민을 잠시 했었습니다.
P.S.3 - 강수연 님은 <씨받이>로 베니스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것에 이어 <아제아제 바라아제>로 모스크바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셨습니다. <씨받이> 때는 정작 영화진흥공사로부터 영화제에 참석하지 않겠냐는 말도 듣지 못했기에 정작 베니스 영화제에서 수상을 하지 못했는데 <아제아제 바라아제> 때는 직접 가셔서 수상을 하셨다죠. 그리고 강수연 님에 가려져서 그렇지, 다른 배우들의 연기 또한 좋습니다. 그 중에서 완장촌의 연기는 짧지만 굵지요. ..하지만 근래의 그를 생각하면 '이래서 배우는 작품으로만 만나야 하는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P.S.4 - 개인적으로 임권택 감독님의 작품을 보면서 영상과 음악을 가장 잘 어울리게 구현하실 수 있는 분들은 정일성 님과 김수철 님이라고 생각합니다. (양방언 님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만 <천년학>에서만 음악을 맡으셨으니..) 그런데 만약 그 두 분이 참여하지 않으셨다면 어울리실만한 분이 구중모 님과 김정길 님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아제아제 바라아제>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하류인생> 때는 신중현 님께서 음악에 참가하셨는데 본인이 직접 저술하신 책에서 음악 삽입 문제로 임권택 감독님과 의견차가 심하셔서 괴로워 하셨다는 일화를 보니 감독님이 음악을 삽입하는 문제에 굉장히 까다로우시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거든요.
외국에서는 30년대 영화음악까지 OST가 나오는 판에 한국은..쩝.. <아제아제 바라아제>의 OST가 있었다면 샀을텐데. (그나마 김수철 님이 음악을 맡으신 작품들은 구하긴 어렵지만 사운드트랙이 출시되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P.S.5 - 아마 이 작품의 DVD는 현재 얼마 발매되지 않은 80년대 임권택 감독 작품 중 일본에서 발매됐다는 <아벤고 공수군단>과 더불어 가장 깨끗한 상태로 볼 수 있는 작품이 아닌가 싶습니다. 가령 한국에 발매되어 있는 <씨받이> DVD는 필름 손상에 그레인에 심지어 가슴 노출 부분에선 모자이크까지 되어있더군요. 일본에서 발매된 <길소뜸> DVD는 화질도 좋지 않은 데다 화면 비율도 왔다갔다 하고요.
한 가지 화가 나는 것은..그게 2005년 경이었던가요, 예전에 영상자료원 측이 78년작인 <족보>와 81년작인 <만다라>를 디지털 복원했다는 소식을 봤을 때인데 복원을 했음 2차 매체로 발매를 하든가 뭐로라도 써먹어야지 그 복원판을 복원 기념으로 화천공사 대표에게 기증을 했다더군요. 아니.. 기증하고 끝낼거면 뭐하러 예산을 들여가면서 복원을 하냐구.. 80년대 한국영화계의 귀중한 작품들을 보유하고 있는 동아수출공사와 화천공사는 나름 DVD 전성기라 할 때도 감감무소식이더니 도대체 언제쯤 그 필름들을 2차 매체로 팍팍 풀거냔 말이다! 지친다 정말..
'
'
'
'
'
'
'
'
'
'
뜨거운 양철지붕위의 고양이 (Cat On A Hot Tin Roof)- 1부 (1) | 2022.11.27 |
---|---|
영화 사막의 라이온(Lion Of The Desert) (0) | 2022.11.27 |
서편제(1993) / Sopyonje (Seopyeonje) (1) | 2022.11.20 |
우묵배미의 사랑(1990) / Lovers in Woomukbaemi (Umugbaemi-ui salang) (0) | 2022.11.20 |
소나기(1978) / The Shower (Sonagi) (0) | 2022.11.20 |